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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어항 속의 어떤 울림

1.
그대는 어항과 물고기의 관계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있는가? 어항이 투명한 것은 물고기가 바깥세상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인가? 세상이 물고기를 지켜보기 위한 것인가?... 만약 물고기가 호수 속에 산다면 그는 하늘만을 바라보고 살 것이다. 그런 물고기에게 하늘은 하루를 살 수 있는 빛과 산소와 삶의 의지를 선사한다. 그래서 물고기의 하늘은 그의 삶에 있어서 세상의 처음이자 죽음의 끝에서나 바라보게 되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항속의 물고기는 늘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길 수가 없다. 물고기의 하루는 고스란히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고 그들의 음모는 늘 들키고 만다. 그들이 먹는 음식의 양,배설물. 일상의 상처, 음모의 자취들조차 유리어항은 감시카메라의 시선처럼 냉혹하게 과거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그래서 나는 물고기의 인간적(?) 삶을 위해서는 투명한 어항이 아니라 삼면이 막힌 하늘만이 열린 어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에게도 비밀스런 일상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평온한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항을 우리 인간이 준비할 수 있을까. 유리 어항은 우리가 물고기를 그 만큼의 넓이로 가두려는 ‘욕망의 산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의 넓이로 세상을 가두고 있음을 반증하는 ‘인식의 감옥’이 아닐까... 어항속의 물고기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유.

2.
윤향숙의 작품이 투명한 방으로 들어왔다. 아트사이드 갤러리의 윈도우 갤러리. 그것은 유리어항과 다름이 없다. 인사동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단숨에 들키고 마는 어항속의 전시회. 어항과 다른 것이 있다면 열린 하늘도 없고 삼면이 벽으로 갇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잠시 무엇을 가릴 곳이나 비밀스런 잠복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유리창은 그러한 의도를 원천적으로 무화시키고 탈색시킨다.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는 경계는 사라지고 그 안에서 행해진 모든 것들이 범죄의 흔적처럼 남는 하얀 방이다. 그 안에서 윤향숙은 점(點)을 들고 유영한다. 바닥과 벽면을 향해. 그 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점은 피부로 살갗의 반점으로 존재하며 주홍글씨처럼 각인되어 있다. 사각형의 표면과 입방체의 표면에 마치 전복처럼, 이끼처럼 서식한다. 우리는 지나가다 발을 멈추고 마치 어항속의 물고기를 지켜보듯 그 안의 비밀스런 흔적을 훔쳐보거나 예술적 몸짓의 의미들을 되새겨 보게 될 것이다. 윤향숙은 유기적인 점, 중첩된 점을 통해 욕망하는 색채들의 전율을 꿈꾼다. 점은 중첩됨으로써 감각적 증식이 가능해지고 연상적 의미들이 비밀스럽게 은닉되고 시각적 혼돈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점은 무한을 향한 출발적이며 시간의 영점이기도 하다. 점은 시간의 연속성을 향해 질주하는 움직임을 예정한 추상적인 도상의 모태이다. 그래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86-1944)는 <점,선,면-회화적인 요소의 분석을 위하여(1926)>라는 저서에서 “점은 정지한 상태에서는 점 자체로서의 생명력은 상실하지만, 이 점으로부터 또 하나의 자립적이고 약동적인 새로운 생명이 기약된다”고 했다. 무용에서 무용수는 점이지만 그는 점의 움직여 나간 흔적인 선의 율동을 통해 자신의 예술을 표현한다. 하나의 무용은 정지된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선의 방향성에 의지하여 희노애락의 문제를 몸으로 표현하지만 결국 하나의 점으로 끝맺음을 한다. 칸딘스키는 점을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Wesen)이면서 물질적으로는 제로(Null)이고, 하얀 백지위에 그려진 점은 하나의 울림(Einklang)을 자아낸다고 하였다. 칸딘스키가 분석대상으로 삼은 점은 ‘침묵과 언어를 잇는 다리’와 같은 것이었다. 이 기호(Zeichen)로서의 점은 윤향숙에게 있어서도 회화적 표현의 원천으로 상정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기호 혹은 기표(significance)의 영역을 넘어서 언어의 형식(Form of Language)을 지향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윤향숙이 표현하고 있는 점이 개인적 발화로서 빠롤(parole)의 차원을 넘어 사회적 체계 속의 랑그(langue)로 인지되는 것은 그것이 색채, 면, 조명 등과 결합되면서 조형의 기의(signifier)를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 침묵의 점들이 울리는 주술적 언어’라고 부르고 싶다.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파란색 등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아크릴박스들은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이루며 바닥과 벽면에 놓여 지거나 부착된다. 그 형태와 색채들은 윤향숙의 생각의 혼돈된 미결정체이지만, 점들과 미묘한 결합을 시도하면서 하나의 예술적 기호로 날아오른다. 마치 나비처럼. 나비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라는 상징적 의미가 여기서 의미롭게 부상한다. 그것은 모호하게 놓여진 조형의 요소들, 즉 점과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색채의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상징적 기호로 환원된다. 그 상징적 기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기의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선다. 안과 밖, 내부적 세계와 외부적 세계, 자아와 타자, 그 대립적 간극을 무너뜨리는 융합의 세계. 그 발가벗겨진 신부의 모습처럼 순결하고 지순한 검은 점들의 생명지향성, 율동, 조형적 호흡들... 조명은 낮과 밤을 구별 짓게 하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의 생성물이다. 낮에 핀 조명은 자신의 광파를 통해 우리 세상에 굳이 밤이 존재함을 인식하게 한다. 그 발산하는 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점들의 향연과 변화된 색채의 낮선 표정. 그렇게 윈도우갤러리속의 윤향숙이 새겨둔 점과 색채, 기하학적 도형의 설치작품들은 순결한 신부의 모습처럼 우리의 시각을 향해 날아든다. 그 주술적 언어들이 우리를 향해 묻는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를. 그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그대가 인식의 감옥속에 갇혀 바라보는 동안은.

3.
윤향숙은 그동안 “이땅에서(관훈미술관,1989)” “명상의방(갤러리빙,1991)” “기원의방(갤러리빙,1994)” “물고기에 관한 명상(일민미술관, 1997)” 등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 왔다. 9년여만의 침묵을 깨고 이번 작은 개인전을 통해 점과 색채들이 빚어내는 조형언어의 본질적 의미들을 탐색하게 된다. 그 출발점은 점의 조형적, 기호적 도상을 상징적 기의로 승화 시키는데 있다. 서로 조합, 응집, 확장, 중첩되는 점을 기초로 하여 유기적 가변성과 다양한 시각적 변주를 실험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처럼 그녀는 점이 하나의 언어적 체계로서 랑그가 되기를 희구하고 있다. 이 예술적 몸짓 속에는 윤향숙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생명증식의 방법론이 내재해 있다. 그녀는 예술이 현대적 공간속에서 어떤 울림을 자아내는 것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칸딘스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면서 “비어있는 공간, 무한한 공간 그 자체, 어둡고 좁은 것과 보이지 않는 수평이 있는 공간 등에 무용수들이 구현하는 리듬, 율동, 균형과 더불어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는 것과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일수 있다. 윤향숙에 있어서 점은 침묵의 기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내면의 우물이며, 그 내면의 우물에서 퍼 올린 피안의 흔들림이다.

우리는 윤향숙의 오랜 침묵과 고독의 폐쇄된 방에서 가꾸었던 피안의 꽃들, 그 색채들이 빚어내는 미묘한 주술적 울림을 듣게 되었다. 그 절대적인 점들이 그려내는 존재의 호흡, 하얀 방에 남겨진 파스텔톤 색조들의 미묘한 충돌소리... 안과 밖이 교호하는 상태의, 유리어항 같은 갤러리에서 들리는 색채의 얼음이 처음 깨지는 소리, 너의 내부와 나의 외부가 서로 마주서서 하나를 향해 눈길을 마주치는 순간.

(2006년 2월) 장동광(예술학, 인디펜던트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