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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방 혹은 물고기들의 침묵

살아있는 물고기의 비가
가자, 가자,
꿈에도 그리던 푸른 바다로 가자
헤엄쳐가지 못하면 강 밑을 기어서라도 가자
청계천은 빛을 받지 못하는 어둠의 굴이 된 지 오래
신림천도 덮혀가고 한강도 덮혀간다.
오염된 폐수는 시하호로 흘러가고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강원도 친구는 댐이 막혀 강아래로 가지 못하고
돌아서 가는 길에 어부의 그물을 만났다고 했다.
친구야 이 산천에 기댈 곳이 어디드냐
끝내 산 속의 절간 계곡물로 거슬러 올라간
어린 동생은 열반을 했는 지 소식도 없다.
가자, 가자,
이 숨쉴 곳 없다는 막다른 시절에
태어난 것을 누구에게 원망하랴
등비늘이 벗겨져도 푸른 바다로 가자


문명의 뒷안길에서
아직 물고기가 살아 있는가, 나는 윤향숙의 작품을 상기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현대산업사회는 기술문명의 신화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반대급부로 물고기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폐수와 오염된 하천에서 숨진 물고기들의 주검들이 지치지도 않고 자주 텔레비전에 등장한다. 그 참혹한 현상을 뚜렷이 기억하는 한 나는 밥상위의 물고기를 먹지 못한다. 퍼덕이면서, 숨을 헐떡이면서 죽어가는 물고기떼, 황금에 먼 인간의 눈에는 썩어가는 물과 검은 매연에 뒤덮힌 가로수가 보이지 않는다. 황금과 소유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비로소 참세상을 깨닫게 된다고 누구나 알고 있다. 그 허허로운 비워짐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서로 화답 할 것이며 푸른 하천이 노래하고 가로수는 새로운 계절을 기다릴 것이라는 사실 또한 버릴 수 없는 나의 희망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1990년에 뮌헨에 들렀었다. 그떄 도심의 하천에서 수영을 하는 젊은이들과 잔디밭에서 웃옷을 벗어 던지고 일광욕을 하는 독일 아가씨들을 보고 충격과 호기심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 곳은 뮌헨 현대 미술관 근처의 공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할머니가 그런 나를 도리어 쳐다본 것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인도와 함께 달릴 수 있는 일상생활 속의 자전거, 전차, 생활하수의 99% 정수, 수풀이 우거진 도심의 공원,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미술관, 건축의 정수로 지어진 고풍스런 콘서트 홀, 야외에서 마시는 시원한 맥주…. 뮌헨에는 여지껏 내가 알고 있던 그런 이상향이 쉼쉬고 있었다.

한 예술가의 초상
김포공항 가는 길, 염창동의 아파트촌 한편에 2층 콘센트 건물이 윤향숙의 작업실이다. 그 비좁은 작업실은 그래도 윤향숙이 결혼 후 마련한 자신의 창조적 거처이다. 윤향숙은 그간 세 번의 개인전을 가졌음에도 아직 가리워진 작가이다. 그녀의 이력에는 그룹전 경력이 없다. 초대해 준 화랑이나 미술관이 없기도 하겠지만 그녀 자신이 늘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치룬 세번의 개인전 중 첫 번째가 <이 땅에서>였고, 두 번째가 <명상의 방>이었고, 세 번째가 <기원의 방>이었다. 첫 번째 개인전을 마치고 그녀는 설치형식으로 작업의 방향을 전환하였다. 우리는 전시제목에서도 그녀의 작품성격에 대한 명확한 단서를 어렵지 않게 포착하게 된다. 그녀의 작품을 지켜 본 나로서 그녀의 작품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선적 관조성에 뿌리를 둔 현대문명에 관한 사색”이라고 집약할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윤향숙의 작품은 동양의 사상에 근거한 명상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그 설치공간 안에서 새로운 예술체험을 경험하게 하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된 작품경향이었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 그녀는 수도승의 모습이 그려진 수많은 종이그림을 벽면에 부착하기도 하고 버려진 낡은 문짝에 그림을 그리고 푸른 공간 속을 만들어 명상의 공간으로 제시한 바 있다. 세 번째 개인전에서 윤향숙은 해체된 집의 기둥을 모아 인디언이나 원시미술에서 볼 수 있는 부적과 같은 그림을 그려 천장에 매달고 일본의 신사 같은 기원의 문을 만들었다. 두 번째 개인전이 작품의 내용면에서 다분히 인도의 불교적 분위기였다고 한다면 세 번째 개인전은 원시미술이 지닌 샤머니즘적 사상에 기반을 둔 기원의 표상들을 공간 속에 설치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녀가 영국에 다녀오고 아이를 낳은 후 점차 삶의 생태적 환경으로 그 시선을 돌린 것이 이번 개이전의 주된 테제라고 생각된다. 이 변화의 길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버려진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새로운 호흡을 불어 넣고 있다. 다소 키취(Kitch) 혹은 정크 아트(Junk Art)적이라 할 수 있는 현대사회의 자취들에 대한 수집과 변조는 그녀의 작품을 구성하는 주된 조형요소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소멸하고 버림받은 것들에 대해 재생의 빛깔을 채색함으로써 마치 주술사가 의식을 집전하는 것처럼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상적인 대상들과 발견된 오브제에 일정한 의미를 가감해 나가는 가운데 그로부터 얻어지는 조용한 사색의 기운을 우리들에게 세례하는 것이 그녀의 작업이 지닌 특징적인 일면이었다. 오브제의 미학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러나 새롭게 변형된 오브제들 속에는 그녀만의 초월적인 눈빛과 그 가늠할 수 없는 사색의 무게가 천칭한 현실인식과 함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거울 속에 감은 물고기에 관한 명상
윤향숙은 어김없이 이번 전시회에도 필요한 재료를 버려진 것들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낙서로 점철된 부서진 아크릴 판과 낡은 철제선반이다. 그녀는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면 개인전을 위한 새로운 사색의 바다로 떠났다. 그 외로운 향해의 한 지점에서 윤향숙은 오염된 이 땅의 하천을 유영하는 물고기에 사색의 그물을 던졌음을 이번 전시회에 표명하고 있다. 물고기, 윤향숙은 물고기를 통해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극명한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삶의 조건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 하다. 이러한 추론에 의지하면 이번 개인전에서 그녀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의 문제를 물고기를 통해 은유적인 어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녀의 작품을 개략적으로 조망하면 대체로 거울에 실크스크린으로 표현된 물고기의 형상은 그뒤에 긁혀진 반사기능의 상실로 인해 조명을 받으면서 발광하게 되거나, 물속에 투영된 물고기의 형상들이 하나의 환영처럼 비쳐지는 것이다. 그러한 조형적 어법으로 어떤 물고기들은 철망에 같힌 채 침묵의 유영을 계속하고 있으며, 어떤 물고기들은 살아있는 채 유리병에 담겨 허공속에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물이 들어있게 될 드럼통에다 거울을 설치함으로써 그려진 물고기의 생태적 혼란을 중층적으로 투영시키고 있다. 또 한 방에 그녀는 비닐막을 드리워진 폐쇄된 상황을 설정하고서 살아있는 물고기의 생명을 시계소리에 의해 감지할 수 있도록 장치하고 있다. 그 불투명하고 음울한 공간 속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미약한 존재의 유한성을 새롭게 반추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윤향숙의 작품에서 폐쇄된 철망 속의 상황은 곧 우리들의 환경이 드리우고 있는 암울한 그림자인 것이며, 거울은 곧 반성의 기제로서 현실을 되돌아 보는 불안한 심리의 표상인 셈이다. 깨지기 전까지 존재의미를 갖는 거울의 속성을 그 불길한 징후와 함께 좌우가 뒤바뀐 현실을 우리들에게 되돌려 준다.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을 통해 그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믿고 있는 한 거울 속의 허상은 바뀔 수 없다. 그 찬란한 허상은 늘 빛과 함께 존한다. 거울은 숙명처럼 빛과 좌우가 뒤바뀐 현실을 동반하고 늘 아침과 함께 깨어나지만 우리는 결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윤향숙이 마련한 거울 속의 방에서, 살아있는 혹은 그려진 물고기들은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의 한 단면일 수 있으나 어떤 면에서 그것들은 폼페이의 유적처럼 화석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버린 것들로부터 언젠가 버림받을 지도 모르는 우리는 새롭게 저 참혹한 오염된 세상의 절규를 들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윤향숙은 이제 누보 레알리스트였던 다니엘 스포에리의 작품처럼 철망에 걸린 어떤 상황을 전시장으로 이전시키려는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끝에서 이번 윤향숙전에서 보여질 물고기에 관한 명상들은 그가 숙명처럼 안고 있는 생명과 삶의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사색의 결과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게 된다. 기획자로서 또 이 전시회에 관한 서문을 쓰는 필자로서 그녀의 작업에 표명하고 있는 관심의 지평이 단순히 과감한 설치형식과 그의 초월적인 조형어법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윤향숙이 지닌 시대를 통찰하는 눈과 예술의 정화작용을 굳게 신뢰하고있는 그의 끊임없는 자기쇄신과 예술적 발상에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예술가가 지녀야 할 조형의 태도를 무엇을 만든다는 행위에 국한시키지않는다. 그녀는 궁극적으로 예술이 하나의 메시지로서, 관람자를 향한 정신적 세례로서 기능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물고기에 관한 그의 명상이 우리들의 산하에 흐르는 한가닥 맑은 물소리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윤향숙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정화하는 색다른 카타르시스에 젖어들게 될 지도 모른다. 예술에서 우러나오는 참다운 정신은 어쩌면 예술자체를 하나의 수행으로 받아들이고 그 수행과정의 고통속에서, 저 오염된 연못의 연꽃처럼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동광 (일민미술관 큐레이터)